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하엘 초르크 (문단 편집)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청소년 국대에 소집된 초르크.jpg|width=100%]]}}}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bottom, #ffe600 0%, #ffe600)" {{{#!html 18살의 초르크}}}}}}'''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81년 청소년 국대 시절의 랄프 로제(왼쪽)과 미하엘 초르크(오른쪽).jpg|width=100%]]}}}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bottom, #ffe600 0%, #ffe600)" {{{#!html 1981년 청소년 국대 시절의 랄프 로제(왼쪽)과 미하엘 초르크(오른쪽)}}}}}}''' || 초르크는 18살의 나이로 청소년 국대에 소집되어 1981년 U-18 유럽 챔피언십에 참가한 것이 시작이었다. 비록 여기서는 벤치를 지켰지만 초르크의 도르트문트 유스 입단 동기인 랄프 로제[* 독일어로 Ralf Loose, 1963년생 [[센터백#스위퍼/리베로|리베로]]로 활동하던 선수로 1981년 U-18 유럽 챔피언십때부터 주장 완장을 단 유망주였다. 호주에서 열린 U-20 월드컵에서 홀로 4골을 터뜨리며 조국을 우승으로 이끈 이력이 있으며 이때문에 초르크보다 더 기대 받았지만 성장이 정체되어 5년만에 도르트문트를 떠나 하부 리그에서 뛰다가 30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은퇴하였다.]와 함께 도르트문트에서 제일 촉망받는 유망주였던 초르크는 [[1981 FIFA 월드 유스 챔피언십 호주|1981년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전경기를 출전하였고, 우승을 달성해냈다. 그러나 그가 도르트문트의 핵심 선수로 뛰었음에도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어느 국제대회에도 출전하지 못하였다.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93년 국대에서의 초르크.jpg|width=100%]]}}}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bottom, #ffe600 0%, #ffe600)" {{{#!html 1993년 국대에서의 초르크}}}}}}''' || 그는 1990년 12월 19일 28세의 나이에 4-0으로 승리했던 스위스전에서 처음으로 국가대표에 소집되었으나, 출전하지 못했다. 1992년 12월 16일, 29세의 나이에 1-3으로 패했던 브라질전에서 후반 14분에 교체 투입하여 처음으로 출전하였다. 등번호는 2번이었다.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공중볼 경합하는 초르크.jpg|width=100%]][[파일:우루과이전 첫 선발 출전하는 초르크.jpg|width=100%]]}}}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bottom, #ffe600 0%, #ffe600)" {{{#!html 우루과이전 당시 초르크의 모습}}}[* 선발 멤버들 대다수가 국대 레귤러 멤버들이다. 뒷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대로 [[위르겐 콜러]], [[안드레아스 쾨프케]], [[토마스 헬머]], [[기도 부흐발트]], 초르크, [[위르겐 클린스만]], [[로타어 마테우스]], [[안드레아스 묄러]], [[올라프 톤]], [[토마스 헤슬러]], [[토마스 돌]]]}}}''' || 동년 12월 20일[* 마침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창단일과 하루 차이다.]에 열린 우루과이전에서는 처음으로 선발로 나섰으며 풀타임 출전하여 4-1 승리에 일조하였다. 비록 본 포지션이 아닌 [[풀백(축구)|레프트백]]으로 뛰었지만 초르크는 익숙치 않은 포지션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음해인 1993년 3월 24일에 열린 스코틀랜드전에서는 중앙 미드필더로 선발 출전하였다. 동년 4월 14일 가나전에서도 중앙 미드필더로 선발 출전했으며 이때부터 등번호를 2번에서 변경하여 8번을 달고 경기를 뛰었다. 특히 이 경기에서의 6번째골 장면때는 초르크의 킬패스를 기점으로 득점이 터지기도 하였다. 1992-93 시즌이 종료된후에 미국에서 US컵이 개최되었다. 미국, 브라질, 잉글랜드, 독일이 참가했으며 여기서 초르크는 브라질과의 첫 경기에도 선발로 출전하였다. 그러나 독일이 브라질에게 선취점으로 3점이나 내준 이후로는 초르크는 후반 9분에 토마스 슈트룬츠와 교체되었다. 이때문인지 미국전에서는 벤치를 지켰으며 잉글랜드와의 최종전에서는 후반 21분이 되서야 교체로 출전하였다. US컵을 우승했다지만 초르크로서는 미래가 어두웠다. 이후 1993년 10월 13일, 5-0으로 이겼던 우루과이전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국대에 소집되지 못했다. 도르트문트에서는 많은 경기를 출전했지만 국가대표를 친선 7경기가 전부였으며 종합 386분만을 뛰었다.[* 참고로 초르크가 출전한 7경기를 모두 뛴 선수로는 [[기도 부흐발트]], [[로타어 마테우스]], [[위르겐 클린스만]] 이 3명이 유일하다. 전부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1990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 멤버면서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경험이 없는것이 특징.] 초르크가 국대에 자리잡지 못한 이유로는 일단 첫번째로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1982년 월드컵]] 당시에는 1960년생 [[피에르 리트바르스키]]나 1961년생 [[로타어 마테우스]]같이 초특급 유망주가 아니고서는 1962년생인 초르크가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UEFA 유로 1984|1984년 유로]]때는 같은 청소년 국대 동기인 랄프 팔켄마이어가 대회에 참가하였으나, 그도 1경기를 뛰지 못했고, 팔켄마이어를 제외한 나머지들은 아예 소집조차 되지못했다. 그러는 사이 [[토마스 베르톨트]]나 [[올라프 톤]], [[안드레아스 묄러]], [[토마스 헤슬러]]같은 후배들이 치고올라오니 중하위권을 전전하는 팀에서 고군분투하는 초르크가 국대에서 멀어지게 되는건 당연지사. 결국 도르트문트가 분데스리가에서 경쟁력이 있는 구단이 될 때서야 국가대표로 경기에 뛸 수 있었다. 그렇다고 레귤러 멤버로 소집되기에는 이미 초르크의 나이가 30세를 넘어 노쇠해졌으니, 초르크에게는 무척 아쉬운 커리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초르크의 파트너였던 [[로타어 마테우스|마테우스]]는 초르크가 첫 경기를 뛰던 시점에 이미 A매치를 109경기 뛰었었고, 초르크가 1993년 이후로 국가대표로 뽑히지 않을때도 마테우스는 꾸준히 국대경기에 호출되어 2000년에 은퇴할때 까지 뛰었다. 이런 마테우스의 나이는 초르크보다 무려 1살이 더 많다는걸 감안하면 정말 대단한 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